[스크랩] <현실 안주와 현실 변혁 사이에서> 2014. 12. 05 대림 제1주간 금요일 (평화방송 라디오 오늘의 강론)
<현실 안주와 현실 변혁 사이에서>
2014. 12. 05 대림 제1주간 금요일
(평화방송 라디오 오늘의 강론)
마태오 9,27-31 (눈 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현실 안주와 현실 변혁 사이에서>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새 하루가 열렸습니다. 벗님들께서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바라십니까?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무름’과 지금과는 다른 무엇으로 ‘건너감’ 사이에서 갈등하며 삶의 여정을 이어갑니다.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인생은 ‘현실 안주’와 ‘현실 변혁’ 사이의 긴장관계에 놓여있습니다. 물론 ‘현실 안주’이든 ‘현실 변혁’이든 어느 것 하나가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으로 그른 것은 아닙니다. 상황, 여건, 목적에 따라서 긍정적 의미를 지닐 수도, 부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에 머물려고도 하고, 반대로 현실을 박차고 나가 극적인 변화나 변혁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면 언제까지나 이 풍요로움에 머물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급격한 변화를 추구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공동체에서 권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이를 놓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외면당하고 공동체 안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자신을 고립시키는 현실을 깨뜨리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일어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안주하려는 성향’과 이와는 상반되는 ‘변화나 변혁을 추구하는 성향’ 모두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쫓는 본능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능적인 욕구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이기적인 탐욕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능적인 욕구가 ‘나-너-우리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과 ‘모든 피조물이 함께 어울리는 공존의 세상’을 지향할 때에, 비로소 긍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믿음의 벗님들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을 담고 있는 현실에 안주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바로 그 현실을 변화시키고 싶으십니까? 왜, 어떠한 이유로 그러하십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삶의 극적인 변화를 꿈꿨던 사람들을, 그러나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 그곳에 머물고자 했던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기에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단절당한 눈먼 두 사람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시력을 회복함으로써,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극적인 변화의 때를 맞은 이 두 사람은 간절하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실 수 있는 분이라 믿었던 예수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라고 물으시자, 그들은 “예, 주님!”하고 서슴없이 대답함으로써,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자신들의 삶의 변화의 또 하나의 주체로 당당히 나섭니다.
시력을 찾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을 현실로 맞이한 이들은, 이 현실을 이루어주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함이 이들에게는 곧 현실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라는 예수님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신 현실에 대해서 주저함 없이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치유 받은 두 사람의 ‘현실 변혁의 간절함’에도 그리고 ‘현실 안주의 애틋함’에는, 볼 수 있는 이와 볼 수 없는 이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이에게 새로운 시력을 주심으로써, 억압과 차별 없는 세상,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이끄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떠올리며, 다시금 믿음의 벗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현실에 안주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바로 그 현실을 변화시키고 싶으십니까? 왜, 어떠한 이유로 그러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