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1일 오후 03:36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
상지종신부님 복음묵상
2015. 01. 11 주님 세례 축일
마르코 1,7-11 (세례를 받으시다)
그때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세례 때의 첫 마음을 되새기면서 세례 받은 이로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자 새롭게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시작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루카 3,3)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에게 여러 계층의 많은 유대인들이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셨는데, 처음에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기를 사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마태 3,11)으로서 자신은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마르 1,7)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께서는 무죄한 분이시기에 “자기 죄를 고백하며”(마태 3,6)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서”(마태 3,15), 즉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굳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하느님 아들로서 드러난 예수님의 공현(Epiphaneia)입니다.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이라는 당신의 사명을 수락하시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이사 53,12 참조),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피 흘리는 죽음의 ‘세례’를 미리 받으셨습니다(마르 10,38; 루카 12,50 참조). 예수님께서는 몸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사랑으로 죽음의 세례를 받아들이십니다(마태 26,39 참조). 예수님의 이러한 수락을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즐겨 받으시고, 성령께서는 예수님 위에 머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담의 죄로 닫혔던 “하늘이 갈라지며”(마르 1,10),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세상은 다시금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창조의 서막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당신 세례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미리 겪으신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그리스도인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속죄하는 신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겼다가 그분과 함께 다시 올라와야 합니다. 그래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세례 받은 날의 기억을 새롭게 보듬어 보십시오. 그 날의 기쁨과 열정으로 세례 받은 이답게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그 날의 첫 마음을 새 마음으로 가지며, 다시 시작하십시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십자가를 향해 나가셨음을 가슴 깊이 새기고, 매일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 기원을 닮아 묵상 글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미약하더라도 쉼 없이 들려오는
하느님의 감미로운 부르심에
마음을 여는 정갈한 다가섬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를 온전히 살아 숨 쉬게 하시는
성령의 따스한 이끄심에
나를 맡기는 자연스러운 끌림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희미할지라도 결코 끊어질 수 없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랑의 관계에
나를 묶는 거룩한 속박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나를 버려야 하는 아픔 속에서도
벗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고결한 희생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탐욕과 죄로 나락에 떨어진 나를 살리시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듯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에 신음하는 하느님께
벗이 되어드리는 따뜻한 동행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나를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나를 살리는
아름다운 순환입니다.
일생의 단 한 번 하지만
생의 마지막 날 하느님 품에 안길 때까지
지금여기에서
새롭게 기억되어지고
새롭게 살아져야 할
생명과 사랑 가득한 성사
바로 세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