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8일 오전 12:37
왜관 고 이삭 신부님의 글. 페북에서 퍼옴
선교총무국 홈페이지 개통을 준비하다가 발견했다. 어느 잡지에 기고했는데, 잡지가 아직도 안 와서 글이 올랐는지는 미확인이다.
겨울 가고 다시 봄이 와도 잊지 않으리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어김없이 우울증이 찾아온다. 겨우내 누적된 음침한 기운을 더 이상 이겨낼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앉아 이리 저리 인터넷 검색을 하며 시간을 죽이거나 아예 방에 들어가 누워 좋아하는 책을 읽고 또 읽는다. 아침 종소리를 듣고도 이불을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기도석에 앉아도 성무일도 순서를 놓치기 일쑤다. 우울하게 드리워진 영혼의 그림자는 창가에 봄볕이 들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사라진다. 올해는 때 아닌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물오른 새싹같이 싱그러운 학생들이 고스란히 바다에 수장되는 걸 생중계로 보았으니 말이다. 안타까움과 무력감 그리고 분노와 자책이 뒤섞인,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묘한 감정이 일었다. 애간장이 녹아내린 부모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세월호 참사를 접하고 기억의 심연 속에 잠겨 있던 한 죽음이 떠올랐다.
교통사고였다. 초등학교 정문 앞 정류소에서 아이 하나가 버스에 깔려 죽었다. 담이 센 친구들이 사고현장을 보고 왔다.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와중에 근처에 있는 가게 아주머니가 쌀 가마니를 한 장 가져와 머리통이 뭉개져 버린 시신을 덮고 소주 한 되를 부어 아스팔트 위에 낭자한 피를 씻어냈다고 했다. 온 동네가 웅성거리고 탄식 소리만 이어졌다. 죽은 아이는 우리 앞집에 사는 동갑내기 여자애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어른들이 죽은 아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트럭에 싣고 묻으러 갔는데, 그 중에 우리 아버지도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손사래 쳤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졸지에 동생을 잃은 여자애는 길가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울었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해가 저물도록 그 애 옆에 서 있었다. 한때 술집 종업원이었다고 소문난 그 애의 새엄마는 동네에서 수군거림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엄마였다. 어린 딸을 잃은 젊은 엄마는 울부짖다 혼절했고 몸져 누워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아마도 여섯 살 때이지 싶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누나들은 그날 후문으로 집에 돌아왔다. 35년이나 지났는데도 어제 일어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한다. 인간의 죽음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때 처음 겪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죽음이든 그 앞에서 침묵하고 애도하는 건 예의이라기보다 도덕에 가깝다.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형식적인 치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말이다. 교통사고로 죽은 아이 앞에서도 우리가 울고 슬퍼해야 할 이유는 충분히 있는 것이다. 모든 탄생이 축하를 받아야 마땅하듯이 모든 죽음도 애도를 받아 마땅하다. 축하 받아야 할 탄생이 따로 있고 애도 받아야 할 죽음이 따로 있다면 그건 평등한 사회가 아닐 것이다.
평등한 사회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서울에 사는 누님에게서 간만에 연락이 왔다. 아들 녀석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단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가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수학여행을 즐기고 친가 외가 어른들에게 용돈까지 잔뜩 받아 왔다고 했다. 서울의 초등학생들은 비행기 타고 제주도를 가는데 안산의 고등학생들은 배 타고 제주도를 간 거구나. 누님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그러고 보니 맞다며 누님이 맞장구를 쳤다. 세월호에 탔던 승객의 대부분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이라는 뉴스를 듣고 무척 의아했다. 내 상식으로 제주도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 곳이다. 더군다나 제주도는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 수학여행 코스가 아닌가. 고등학생들이 일본, 대만, 중국 같은 해외로 수학여행을 다닌다는 말을 오래 전에 들은 것 같은데. 아무튼 세월호 희생자 학생들에게 가난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제 그만 울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자들의 논리가 이 가난을 겨냥한 것이라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늘 그렇듯이 국가와 언론은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여당과 주류 언론, 그리고 그에 합세하여 유가족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심지어 조롱했던 사람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도덕적이며 예의가 없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피붙이를 잃고 찢긴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부모들에게 그들은 너무나 가혹한 짓을 했다. 유가족들을 보상금이나 챙기려고 과도한 요구를 하며 떼를 쓰는 염치없는 사람들로 매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참사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단식장 앞에서 통닭과 피자를 포식하는 모습은 저질 코미디와 다름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꽃다운 학생들이 그저 바퀴벌레처럼 우글거리는 없는 집 자식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상급식이나 바라고 복지 예산이나 축내는 게으르고 대책 없는 지긋지긋한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들 말이다. 진실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그들의 치졸한 논리를 듣고 있노라면 한숨만 나온다.
한심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였나. 내가 아는 대한민국은 이렇게 무능한 나라가 아니다. 4대강 공사를 봐도 그렇다. 단군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를 정말 일사불란하게 해내지 않았는가. 군인들을 동원하고 포클레인 기사들까지 딱달해가며 기어코 금모래 반짝이던 강줄기들을 단 4년만 작살내 놓았다. 정관계를 비롯하여 재계와 학계 그리고 언론까지 완벽한 협조체계를 구축하여 이룬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 정부에게 안 되는 일이란 사전에 없는 것이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정신이 투철한 지도자 밑에 오래 단련된 공무원들이 못해낼 일은 없다. 여차하면 산도 뽑고 바다도 메워버린다. 수조원씩 드는 국제대회는 또 얼마나 훌륭히 개최하는가. 그런데도 대형 사고가 터지기만 하면 속수무책인 까닭을 알 길이 없다. 사고가 터지면 정부가 나서 재빨리 수습할 생각은 아니하고 모금 운동부터 벌이는 것도 웃긴다. 세금을 거두어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다. 나라 돈을 먹는 해경과 해군은 맥을 못 추고 오히려 어민들과 민간인 잠수부들이 더 활약한다. 어제 오늘일이 아니라 그리 놀랍지도 않다.
교통사고로 온 동네가 뒤집어지고 얼마 후에 일어난 일이다. 새벽녘부터 음울한 소식이 온 동네를 휘감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소근 대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마을 사람 대여섯 명이 그물을 거두러 바다에 나갔다가 그만 파도에 배가 뒤집혔다는 것이다. 기운이 팔팔한 사람 둘만 용케 포구까지 헤엄쳐 나왔고 나머지는 모두 빠져 죽었다.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지자 리사무소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해녀들이 소집되었다. 어촌계에서는 이웃 동네 해녀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이웃 동네 해녀들은 우리 동네 바다로 갔고 우리 동네 해녀들은 이웃 동네 바다로 갔다. 해녀들이 자기 동네 바다에 들어가면 익숙한 곳이라 건성으로 찾을까 염려되어 그랬다고 했다. 사나흘동안 해녀들은 샅샅이 바다속을 수색해서 시신을 전부 수습해 냈다. 그때 면사무소와 경찰지서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이 알아서 다 했으니까 굳이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필요한 때에는 나타나지 않으면서 정부는 할 말이 많다. 경제 성장, 국가 안보, 민생 안정 지겹지도 않고 떠든다. 어느새 슬그머니 세월호 참사에서 발을 빼고 시치미를 뗀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희생자 유가족과의 면담을 거부하면서도, 이역만리에서 날아와 그들을 위로한 교황을 보고는 고맙다고 했다. 자기 할 일을 대신해 줘서 고맙다는 말인가. 대통령의 영혼없는 눈물 몇 방울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착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세월호 참사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님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 뒤에 얽히고 설킨 부패와 부조리들. 사고 발생부터 지금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돌아보면 어설프게 연출된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삼류 막장으로 말이다. 아무리 보아도 숨기려는 무엇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게 겨울이 가고 봄이 온들 잊혀질 사연인가. 아직 할 이야기가 더 있지만 일단은 더 울어야겠다. 사람이 죽으면 삼년은 슬펴해야 하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배웠다. 삼년은 못 울어도 일년은 울어야겠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과 함께 울고 비정한 사회를 대신하여 울고 싶다. 개운하게 속을 비워낸 후 맑은 정신으로 또렷이 기억하련다. 나를 포함하여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은 가진 것이라고 목소리 밖에 없는 가난한 처지이다. 하지만 사회가 목소리마저 내지 못하게 하니 이제 남은 거라곤 기억밖에 없다. 끝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났던 일을 35년 뒤에도 낱낱이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