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묵상

2016년 1월 22일(연중 제2주간 금요일) / 상지종신부님

별osb 2016. 1. 22. 22:08


마르코 3,13-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것은 공생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 혼자 모든 사명을 수행하실 수 있었던 예수님께서

굳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천대받던 사람들을 당신의 사도로 부르심으로써,

‘예수님과 사도들’, 곧 ‘하느님과 사람들’이 하나 된 공동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사도들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이 감격스러운 일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격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을 통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분께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어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려 그들을 파견하기 위함입니다.

열 두 사도를 뽑으신 결정적인 사건을 복음서는 단 몇 줄로 전하고 있지만,

이 안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전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부르심, 다가섬 곧 부르심에 대한 응답, 머무름, 그리고 보내심 곧 파견’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는 흔히 할 수 있는 인간중심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서기 전에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의지로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도권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심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이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요합니다.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 다가설 수도 있지만, 이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만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비록 주님의 일이라 하더라도 어떤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 곁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곁에 머물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곁에 머물며,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변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우리도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동참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 밥이 되어 오시는 성체 안의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우리 자신도 이웃을 위해 밥이 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무름으로써 변화된 우리는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거스르는 이 세상의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다시 말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방해하는 치열한 경쟁의 논리를 깨뜨리고,

돈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를 무너뜨리라고,

우리를 세상 한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참 평화와 화해의 삶을 우리만의 전유물로 만들지 않고,

이 삶을 모든 이에게 나누기 위하여 세상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르심, 다가섬 곧 부르심에 대한 응답, 머무름,

그리고 보내심 곧 파견’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주님께서 부르실 때가 있고, 주님께 다가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 머물러야 할 때가 있으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시간에 충실해야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이 시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사도로 초대받습니다.

그러니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주님께 다가가 함께 머물며,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벅찬 마음으로 세상의 벗을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이 고귀한 여정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의정부 교구 교하본당 상지종 신부>


군중과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열두 명을 선택하신다.

이 열두 명이 맨 처음으로 새로운 백성을 이룰 작은 공동체다.

공동체의 사명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님과 더불어 몸 바치고(예수님과 함께 있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설파하고),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따돌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마귀를 쫓아 내는) 일이 그 내용이다.
악령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지른다.

악령들도 정통교리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교리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그러나 악령의 신앙고백은 예수께 세력과 권력을 잡으라고 꾀어내기 위한 고백이다.

우리도 교리를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은근히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지 않고 지배하려 들면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교리를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위선자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고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살게 하려는 당신 계획에 몸 바치도록하기 위해서다.

자기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내세우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서 억눌리고 빼앗기고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해방하여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해 주는 사업에 몸 바칠 의무가 있다.
다른 제자들과 베드로마저도 마찬 가지지만,

유다 이스카리옷이 유별 나게 예수님의 사명을 오해하고 있다.

예수께서 권력을 잡아 지배하고 유다 나라와 백성을 로마 제국에서 독립하게 하고 전 세계에 위세를 떨치게 할 줄로 오해하고 있다.

예수께서 섬기는 왕으로서 유다 백성을 포함한 모든 백성을 하나 되게 할 왕이심을 모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