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묵상

2017년 8월 29일 이영근 아오스딩수사님(파주 올리베따노 수도원)

별osb 2017. 8. 29. 16:14

마르 6,17-29(연중 21 화: 파티마 성모님 국제순례 9일기도 여덟째 날)

오늘은 “파티마 성모님 국제순례를 위한 9일기도 여덟째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고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헤로데가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진실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그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 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고난을 떠올리면, 금세기의 의인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입니다.
그는 1945년,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나치에 의해 사형 당했습니다. 그는 히틀러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당시의 국가교회를 탈퇴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고난에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까닭이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 온 바람에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 의식으로 불태웠던 것입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그가 <옥중서간>에서 썼던 이런 글귀가 적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말씀을 위하여 바쳤으며,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 말씀을 가르쳤다”

그는 참으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되, 예수님처럼 죽음을 통해 가르쳤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불경스러운 세 가지 죄악에 대해서 듣습니다. 파렴치한 생일잔치, 소녀의 음탕한 춤,

임금의 무모한 맹세가 그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권력자들과 재벌들만의 잔치가 있고, 자신들의 이익 놀이를 위한 춤이 있고, 상호 밀약과 결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맹세와 밀약과 결탁은 결국, 많은 무고한 의인의 죽음을 불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됩니다.

비록 혀가 잘려 언론이 통제 되어도, 온몸이 혀가 되어 외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광장에서 숨 막히게 외치는 그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예언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참된 목소리는 우리에게 진리를 위해 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함께 눈물 흘리며 남을 위해 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진정 사랑하는 길을 가르쳐주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울게 하소서!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 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인가 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그의 목숨은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목숨이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폭군이 그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위에 올려 진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비록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있었어도, “말씀”을 못 박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말씀은 더더욱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예언자의 소리는 결코 멈추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가려질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례자의 요한의 죽음으로 어둠이 드러났듯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어둠이 들통 났습니다. 결코 손바닥으로 해를 다 가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기 전에 다락방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사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순교 현장에서 성모님을 만납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과 고통을 함께 하신 성모님을 만납니다.
사실, 성모님의 고통과 죽음은 아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곧 성모님의 고통과 죽음은 아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지는 고통과 죽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 없으면서 죄의 허물을 짊어지는, 구원을 위한 고통과 죽음입니다.

성모님의 박해와 순교는 우선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헤로데의 어린 아기들의 학살로 이집트로 피신하신 장면(마태 2,16-18)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기를 낳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죽음을 피해 어린 아기를 품고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성모님의 마음은 찢어지고 아팠을 것입니다.

살육당하는 아기들의 어머니들의 아픔을 통째로 짊어져야 했고,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 그들의 원망과 증오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아기 예수님을 희생시켜 다른 많은 아기들을 살육에서 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는 아들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 어머니의 순교였습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마리아에게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고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모한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아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지신 성모님은 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옷 벗겨져 함께 조롱받으셨고, 함께 버림받아야 했고, 함께 목마르셨고, 함께 못 박혀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드님 죽음의 “십자가 아래에” 서 계셨습니다(요한 19,25-27).

아들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처참한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셨고,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십자가 아래에서 함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아들을 대신해 가슴에 창이 찔리셔야 했고, 무릎이 꺾이셔야 했습니다.

그토록 고통과 박해와 죽음의 순교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리신 아들의 피 흘린 시신을 품에 안으셔야 했고(요한 19,40),

패배와 무능함을 품에 안으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묻으셔야 했습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는 온 생애를 통하여 고통과 죽음을 짊어지시고 사랑의 순교를 사셨습니다.

그야말로, 정결례 때 시몬이 예고한 대로, 아들과 함께 “반대 받는 표적”(루카 2,34)이 되어야 했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셨습니다.’(루카 2,35 참조).
그렇게 아들과 함께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바치시고, 순교의 멍에를 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순교자의 모후”로 불리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이러한 삶을 성 베르나르도는 "정신적 순교"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온 생애를 바쳐 순교하신 “백색순교”와 매 순간을 자신의 뜻을 주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녹색순교”의 삶을 사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에서는 고통 받으신 성모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써 함께 바치셨으며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58항)

이처럼, 성모님의 고통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았던 슬픔과 고통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의 통고는 예수님의 구세사적인 수난과 죽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렇습니다. 아드님은 다른 어떤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으로 죽임을 당하셨고,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어는 누구의 사랑에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으로 그 죽음에 참여하셨습니다.
바오로 6세 교종의 문헌 <마리아 공경>에서는 성모님의 고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신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의 어머니로서 고통을 당하셨다"(<마리아 공경> 7)

그러니 예수님의 고통과 순교가 곧 성모님의 고통과 순교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통고”(compassio)를 말합니다.

곧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받으신 것을 말합니다. 곧 구원의 고통에 "참여"(partitipatio)한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아픔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아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 통고 축일”의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당신 성자 곁에서 그 모친 마리아도 함께 수난하게 하신 하느님,

당신 교회로 하여금 성모와 함께 그리스도의 수난을 나눔으로써 그 부활에도 참여케 하소서"

사실, 고통은 벗어나야 할 그 무엇이기에 앞서 하나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고, 그 속에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이나 어려움, 괴로움과 힘듦,

슬픔과 아픔 등은 없애야 할 그 무엇이거나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고, 고통과 함께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곧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스 큉이라는 신학자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어려움이나 고통에서 건져주는 사랑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신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고통과 어려움, 박해와 순교의 죽음 속에서도 “말씀을 따르신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성모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부 푀멘은 말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겪게 되는 박해와 죽음 안에서 구원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고통과 죽음은 단지 인간적인 아픔과 어려움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도구요,

구원에 이르는 통로라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통과 죽음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신앙을 양육하십니다.

죽음과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바로 그 속에서 하느님께 응답하게 합니다.
이처럼, 고통과 죽음은 하느님의 기묘한 섭리와 신비가 이루어지는 통로요,

신앙생활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죽음은 예수님께서도 결코 피해가지 않으셨고, 성모님께서도 결코 피해가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반겨 기꺼이 지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 고난을 “반드시” 지고 가야할 것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안에 되살아나야 한다.”(마태 16,21; 루카 9,22)

그리고 <히브리서간>은 이렇게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이제,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죽음과 고통을 구원의 통로로 질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삶에서 고통 받고 박해받을 때 성모님께 기도하십시오.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바로 그 고통을 통하여 기도하고, 그 고통과 함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고통과 죽음에서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고통과 박해 안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주시고,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고통 안에서 사랑을 가르쳐 주시고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