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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뭐라도 합시다"

별osb 2015. 2. 28.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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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말 오래도록 들어준 적 있나요?
한국 사회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잔인하다. 사회가 갈수록 뒤로 물러나는 것 같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누구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삶이 동반하는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조회수 : 9,661 | 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 원장) | webmaster@sisain.co.kr

 




  
   
4강 주제는 ‘상처받은 마음을 넘어, 공동체의 치유를 위해’였다. 강단에 선 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은 ‘주제가 너무 무거웠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가 받은 크나큰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지 나름 고민하고 묵상했던 내용을 나눠보고 싶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마음의 병을 어루만지는 세심한 처방과 대안으로 대중적 호감과 신뢰를 쌓아온 그다운 신중함이었다. 2월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강의에 앞서 요즘 내가 만나는 아이 얘기를 해보려 한다. 지능지수(IQ)가 70~ 80 정도인 아이다. 지적 장애가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정상 범위에서는 벗어난다. 이 아이의 경우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 공부를 따라잡기 힘들어 한다. 친구들이 하는 말을 바로바로 알아듣지 못하니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생겼다. 당연히 부모는 걱정이 많다. 그런데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경계선 지능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모양이다. 경계선 지능을 타고났지만 열심히 노력해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 등의 사례가 소개됐다고 한다. 의사로서 그 얘길 듣고 약간 의심스러웠다. 진단 자체가 잘못됐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이 프로그램을 본 아이의 반응이다. 엄마 말로는 아이가 앞으로는 희망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말했단다. 과연 그럴까? 만약 노력했는데도 안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왜 머리가 나쁘게 태어났을까요? 머리 좋게 태어났더라면 좋았을걸.” 그런데 앞으로 아이는 이렇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의지력이 약해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거라고.

이게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생각이다. 누가 뭔가를 못하면 이를 의지의 문제로 몰고 간다. “제가 공부를 안 했으니(노력을 안 했으니) 이렇게 사는 거죠”라고 말하는 20대도 흔하다. 과거에는 신분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했다. 귀족으로 나면 놀고먹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지금은 능력이 신분을 대체한 듯하다. 능력 있는 사람은 잘살고, 능력 없는 사람은 못사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능력이 왜 없냐? 노력과 의지가 부족해서라는 식이다. 그런데 능력이라는 게 과연 노력으로만 이뤄지는 건가? 그렇지 않다. 공부를 잘하는 데는 타고난 지능과 노력 외에 외부에서 주어지는 교육 기회 등도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능력이 있건 없건 누구나 어느 수준 이상은 살 수 있게끔 기본적인 여건을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 능력 없으면 무시당하고, 이걸 다 본인 탓이라고 여기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 어머니가 아이에게 다큐멘터리를 보여준 것은 아이를 사랑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기본적인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은 사회에서는 이런 사랑의 행위가 아이에게 굉장히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아이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은 좋지만, 이로 인해 아이가 스스로를 한심한 존재라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흔히 “너 공부 안 하면 노숙자 된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나? 이건 일종의 협박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협박하는 이런 문화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실은 어른들부터가 다들 협박받으며 살고 있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도태될지도 몰라. 회사에서 자리 뺄지도 몰라’라는 식으로. 이런 협박에 겁먹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쌍용차 사태나 세월호 참사 이후 벌어진 상황들을 보며 우리 사회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정리해고라는 게 무조건 악은 아니다. 산업이 변화하다 보면 인력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는 상황도 발생한다. 문제는 그 방식이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다. 너는 능력이 안 되고 모자라니까 나가라는 식으로 노동자들을 내몰았다. 정리해고 대상인 노동자들이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있게끔 6개월 이상 시간과 기회를 준 볼보자동차 같은 방식도 있는데 말이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결국 돈 때문에 부모들이 저런다’는 얘기가 광범위하게 퍼졌다. 과연 그랬을까? 이런 사고를 당하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죄책감에 빠진다. 내가 평소 잘 못 챙겨 아이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보상 전문가들은 부모들의 이런 심리를 악용해 보상가를 후려치기도 한다. 이런 부모들을 사회가 더 큰 상처로 내몬 것이다.

묻고 싶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왜 그토록 큰 충격이었을까. 내가 열심히만 노력하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제까지의 믿음이 깨져나갔기 때문 아닐까?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저항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지만, 사실 한국 사회에는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이 사람들조차 세월호 앞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아무리 약삭빠르게 편법을 쓴들 이런 상황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겠구나, 하고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인 서천석 원장은 방송과 집필 활동을 통해 대중과도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인 서천석 원장은 방송과 집필 활동을 통해 대중과도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불행을 좀 더 크게 겪게 만드는 사회

요즘 한국 사회가 갈수록 뒤로 물러나는 것 같다. 외환위기 직후 유행어가 “부자 되세요”였는데, 그 뒤 ‘웰빙’ ‘힐링’으로 바뀌더니 세월호 이후로는 그조차도 허망해졌다. 오죽하면 <시사IN> 강좌 제목이 ‘뭐라도 합시다’일까(웃음). 사실, 그 누구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중문화는 복고 일색이다. 좋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시름을 잊고 위안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삶은 불행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불행은 인생에서 불가피하고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다. 다만 불행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따라 상처의 크기도, 이후의 삶도 달라지게 된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불행을 좀 더 크게 겪게 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가능한 한 불행을 적게 겪게끔 사회가 도와줘야 하는데 현실은 반대다.

요즘 ‘트라우마’라는 말을 쉽게 쓰는데, 사실 이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전문가들이나 쓰는 용어였다. 초창기만 해도 트라우마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통상적으로 만나기 어려운 압도적인 경험’이라 정의되곤 했다. 트라우마 연구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베트남전 참전 군인과 성폭력 피해자들이다. 당시 의사 입장에서는 이들이 겪은 경험이 매우 예외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월26일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시민들이 19박20일 도보 행진에 나섰다(위).

ⓒ시사IN 신선영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월26일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시민들이 19박20일 도보 행진에 나섰다(위).
트라우마의 특징은 네 가지,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통제의 상실 △자기 붕괴의 위협이다. 보통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인간이 보이는 반응은 ‘fight(싸우느냐)’ 아니면 ‘flight(도망가느냐)’이다. 곰과 마주치는 순간 원시인의 뇌 속에서는 편도체라는 부위가 빠르게 전신 사이렌을 울렸을 것이다. 이런 반응이 인류 유전자에 프로그래밍된 결과 지금도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 누구나 온몸의 피가 근육으로 몰리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가팔라진다. 집중력 또한 높아지면서 싸울지 도망갈지를 빠르게 결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한번 붙어봤는데 곰이 너무 힘이 세 완전히 깨지거나, 도망가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면 트라우마가 생긴다. 그 결과 다시 유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을 때는 몸에서는 익숙한 반응이 일어나는데 내가 변화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미리 무력감에 사로잡히면서 자기 통합에 실패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입게 되면 ‘세상은 안전하다, 믿을 만하다’는 기본 신뢰가 붕괴된다.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 근거 없이 세상을 안전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곳에 앉아 편히 강의를 듣는 것도 이 순간 집에 도둑이 들거나 불이 날 일이 없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믿음이 한번 붕괴되면 세상을,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 트라우마가 심해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사람들의 경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 늘 두꺼운 안경이나 장갑을 끼고 유리창 밖의 세상을 내다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반면 상처와 관련된 기억은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외의 일상은 재미도, 흥미도 없다.

트라우마 치료가 어려운 게 이 때문이다. 세상은 안전한 곳이라는 믿음과 더불어 인간의 기본 믿음 중 하나가 ‘나는 가치 있는 존재이며, 세계 질서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깨지면 기본적인 인간관계에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남에 의해 자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깨지면서, 스스로를 더는 자율적인 인간이라 여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율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면 자기 자신을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기게 된다. 남에 대한 의심이 커지면서 열등감도 심해진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과도하게 의존했다 물러나는 모순된 대인관계 패턴을 반복한다. 그 결과 공동체와의 연결도 끊기게 된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트라우마는 아주 예외적인 사람들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9세, 11세, 13세 아동 1420명을 16세까지 추적 조사한 미국의 한 연구(<Great Smoky Mountains Study>)에 따르면, 전체 아동의 3분의 2가량이 잠재적 트라우마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살아가면서 상당수가 트라우마를 겪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것이 심각한 장애로까지 이어져 PTSD 진단을 받은 아동은 전체의 0.5%에 불과했다(약한 PTSD 증상을 보인 아동은 전체의 2.2%). 나머지 90%가량은 아무런 증상을 느끼지 않고 별일 없이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아까 말했듯 인생이란 불행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단, 불행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따라 PTSD에 시달릴 수도, 시달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불행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정리해고나 자식의 죽음은 그 자체로 지독한 고통이다. 특히나 자식의 죽음은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다. 자식은 결코 되살릴 수 없으니까.

정신과 의사로서 생각하기에 고통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이다. 그냥 그렇게 주어져 있다. 그런데 ‘그 고통을 왜 나만 겪어야 해?’ 할수록, 고통을 부인하려 하면 할수록 사람은 더 괴로워지게 된다.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게 된다. (유리잔 사진을 보여주며) 고통은 어쩌면 이 잔이 깨져 물이 엎질러지는 것과 같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 좋겠지만 고통은 늘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잔이 온전한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잔이 엎질러지지 않게 잘 지켜봐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트라우마는 삶의 진실을 알려주고, 나를 지금 수준에서 한 차원 성숙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인정하게 되면 잔이 엎질러진 다른 사람 또한 안쓰럽게 바라보며 공감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도 성숙해질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잔인하다. 빼앗긴 사람끼리 무한경쟁을 하게끔 하고, 내부의 적을 자꾸 만든다. 국가는 국가대로 소수의 국민만 지키려 들 뿐 다수의 고통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 자력갱생하려다 하나둘씩 엎어지는 게 지금의 상황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함께 밥 먹는 시간 자체가 치유적이다. 위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치유 공간 ‘와락’.

ⓒ시사IN 신선영
함께 밥 먹는 시간 자체가 치유적이다. 위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치유 공간 ‘와락’.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사람을 존중하고,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어야 한다. ‘동정’이 아닌 ‘공감’을 해줘야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사람 말을 들어주는 걸 굉장히 어려워한다. 오래 들어주는 걸 시간 낭비라 여기면서 빨리 결론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빨리빨리 해서 남는 시간에 뭘 할 건가? 빨리 죽을 건가?(웃음) 그러다 보니 한국 사회는 실제적 해결책을 찾는 데도 취약하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면 쌍용차 노동자나 세월호 유가족이 뭘 원하는지 잘 들어주고,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아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아야 사회도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돈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사건을 빨리 덮어버리려고만 한다. 200년에 걸쳐 성당 하나 짓는 다른 나라는 부러워하면서 정작 우리는 2년도 길다며 조바심친다. 진상 규명을 하자는 사람들을 사회 혼란 세력으로 몰아 편가르기를 하면서…. 세월호가 남긴 교훈이라는 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 결국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전히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의 트라우마가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이다.

좀 더 성숙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트라우마의 경험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성숙하고 좋은 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은 본래 자기 잇속만 차리게 돼 있다고? 아무도 챙겨주지 않을 거라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분명 그렇다. 유명한 마시멜로 실험이 있다. 교사가 지시할 때까지 눈앞에 놓인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린 학생들이 못 기다린 학생들에 비해 성적도 좋고 나중까지 잘 살더라는 결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변형 마시멜로 실험에서는, 교사가 몇 번 약속을 어긴다. 곧 기다리면 마시멜로를 준다 해놓고서는 잊어버린 척하며 끝내 이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몇 차례 반복되면 마시멜로를 못 참고 중간에 먹어버리는 아이들이 몇 배 증가한다. 곧 내가 가만히 있으면 이익이나 권리가 침해된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는 각자가 자기 잇속을 차리게 되는 것이다. 반면 국가나 사회 같은 공동체가 나를 챙겨준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극단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사람은 단순한 경제적 동물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 하고 의미 있는 사회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는 것, 때로는 이로 인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것, 이것이 심리학의 발견이다.

결국 우리가 상처에서 벗어나려면 의미를 잘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내 얘기만 실컷 하면 그건 무의미한 말이 돼버린다. 내가 이 얘기를 하면 상대가 무엇을 느낄까 고민하는 게, 의미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지지의 그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행복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외향성·개인주의·돈 등을 꼽곤 한다. 나는 거기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나누는 행복을 추가하고 싶다. 페이스북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심리학 연구를 봐도 친구·가족과 맛난 것 먹을 때를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은 응답자가 많았다. 치유 공간 ‘와락’에서 쌍용차 가족들이 함께 밥 먹는 시간을 갖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밥 먹는 시간 자체가 치유적이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와락에 이어 안산에서도 밥 먹는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렇게 지지의 그물을 만들어가며 공동체가 함께 해결책을 구해가는 과정에서 4·16 트라우마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정리·녹취/ 김은남·전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