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생활의 쇄신을 위한 제언 - 최혜영 수녀
최혜영(가톨릭 대학교 교수/성심 수녀회)
새로운 천년대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미래를 잔뜩 꿈꾸는 사춘기 아이들처럼 새로운 천년기를 맞는 우리의 마음은 설렘과 호기심으로 들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 생성되고, 성장하고, 변화해 온 수도 생활에도 새로운 시대를 맞아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한다.
새로움에 대해 적응과 쇄신을 못한다면 소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수도자들도 이 때를 쇄신과 도약을 위한 좋은 기회로 삼아 가지치기를 할 필요가 있다.
수도 생활에서 양보할 수 없는 근원적인 요소는 무엇이며,
부수적이어서 과감하게 고치고 버려야 할 요소는 무엇인가?
전환기에 있는 ’오늘’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게 하며 잠재력을 발휘해 미래를 꿈꾸게 한다.
우리는 오늘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지 진지하게 질문하며,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한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수도자로서 고민하는 문제를 짧은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수도자의 ’구별’증
많은 수도자들은 하느님께 봉헌되었다는 자부심 때문에
평신도들에게 우월 의식을 가지면서도 인간적인 면으로는 열등 의식도 갖고 있다.
그래서 평신도를 대할 때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그들과 구별하여 우월하게 여기고
’비밀’, ’봉쇄’ 등의 용어로 폐쇄적인 사고를 정당화하거나 수도 생활 자체를 신비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수도 생활은 자매 형제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기 때문에
’구별’, ’비밀’, ’봉쇄’ 등의 은폐적인 용어들을 사용함으로써 폐쇄적이고 배타적이기보다는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폐쇄적 사고 때문에 말끝마다 ’평신도’를 붙이거나,
평신도 교우들을 대할 때와 수도자나 성직자를 대할 때의 태도가 다른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또 수녀들은 이러한 위계적인 사고 방식으로 같은 수도회 안에서
수련자와 유기 서원자, 종신 서원자의 서열을 지나치게 구별하고
서열이 낮은 사람을 아랫사람 대하듯이 하는 경우가 많으며
다른 수도회 소속 수녀들까지도 서열에 따른 우월 의식이나 편견을 갖고 대할 때가 많다.
수도자의 ’미루기’증
수녀 각자가 주체성과 책임을 가지고 결정하거나 답변할 수 있는 경우에도,
곤란한 일은 순명의 이름으로 장상에게나 남에게 미루는 경우가 많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볼 때 분명히 성인인데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또 혼자 외출하거나 행동하는 일이 적고 단체로 움직이는 일이 많아서인지,
내 생각이 다른 사람과 다를 때 불필요하게 불안해하고 쉽게 자기 생각을 포기해 버린다.
또한 개인보다는 단체를 우선하는 특성 때문에
공동체에서 독특한 성격을 가졌거나 행동 양식이 다른 회원을 받아들이는 폭이 좁은 것 같다.
수도자의 ’경제 개념 초월’증
수도자는 보통 개인 소유물이나 용돈을 갖지 않는데,
이 때문에 세상의 재물에 초탈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다른 이들이 겪는 경제적 고통에 함께하지 못하게 만든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을 만큼 독립적이어야 하며
현실의 필요에 정직하게 직면하고 필요한 것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특히 가족 방문이나 특별한 공부를 할 경우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
수도자들의 ’다행’증
불행이나 고통이 닥쳤을 때 그에 맞서 고통의 깊이를 파헤치려는 힘이 약하다.
잘못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쉽게 하느님의 뜻이라고 단정해 버리거나,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식의 해결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수도자에게 절박한 일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이 세상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을 펼치시는 구체적인 현장이라는 역사 의식을 가지고
삶을 좀더 진지하고 철저하게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수도자의 ’위하여’증
수도자들은 쉽게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너(너희,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이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남의 처지를 생각해 주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우가 많다.
한편 남의 필요를 들어주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의 필요를 간접적으로 충족시키기 때문에 자기의 필요가 무엇인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참다운 겸손도 아니고 양보도 아니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또 악과 거짓의 요소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만 심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또 남을 위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봉사할 수 있다.
수도자의 ’비밀’증
우리 나라 대부분의 수도회는 활동 수도회인데도
수도회 구역을 봉쇄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역 공동체와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본당에서도 수녀원 구역은 봉쇄 구역으로 정하여 특정한 사람의 출입만을 허용하는 묘한 구분을 하고 있다.
새로운 천년대는 평신도들과 더불어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봉쇄의 진정한 개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지역 주민과 좀더 가까이 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수녀들의 ’거룩’증
우리 안에 깊숙이 내재한 이원론적 사고 방식은 성과 속을 지나치게 구별하여
수도자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수도자가 병이 나서 입원할 때 독실을 요구하거나 여행 중 독방을 요구하는 것이 수도복을 입기 때문에 정당화되지만
가난을 사랑하는 수도적 삶과는 맞지 않다.
수녀원 안에 수영장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수녀들이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에 가는 것은 수도 정신과는 동떨어진 문제일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기에 좀더 유연성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승려들은 공중 목욕탕에 자유롭게 출입하고 또 보는 사람도 자유롭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우리의 사고 방식에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성과 속을 구별하지 않고 통합할 수 있는 전인적인 사고 방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수도복은 회원간의 평등 의식, 기도 분위기 조성, 수도 생활에 대한 증거 등에서 장점이 많지만,
일반인과 구분하거나 특별 우대를 기대하게 한다는 면에서 불편한 점도 많다.
수도 생활에서 복장은 근본이 아니고 방편인 만큼 유연성이 있으면 좋겠다.
등산이나 소풍, 여행의 경우만이라도 자유로운 복장을 할 수 있다면 수도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례 화려’증
전례는 역사적으로 수도회들 안에서 혁신되고 다양한 방법으로 거행되어 왔는데
오늘날 한국 수도회들은 전례에 대한 쇄신보다는 고수하려는 경향이 짙어 창의성이 크게 떨어진다.
시간 준수에 얽매인 성무일도는 사도직의 성격상 시간에 제약을 받는 분야가 많이 있는데도
이런 배려가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교회 전례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혁신적이고 생동감 있는 전례로 나아가는 데도 소극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전례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보다는
전례가 거행되는 장소를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중시하는 우리의 태도는 쇄신의 여지가 많다고 본다.
또 전례를 위해 지나치게 화려한 꽃꽂이를 할 때가 많은데,
이 소비적 행위는 자연을 농약으로 오염시키는 생태학적 위협이기도 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전례를 하기 위해 시작된 구유가 몇 백 년이 흐르면서 의미보다는 전통으로 답습되고 있다.
’옳소’증
수도자는 옳은 일을 옳다고 하고 잘못된 일을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강론 중이나 강의를 통해 잘못된 말을 일방적으로 들었다면 항의할 수 있어야 한다.
경직된 위계 질서가 있는 교회가 아니라 평등하고 자유로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비판적이고 예언자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장상에게나 사도직 현장의 윗사람에게 지위의 높낮이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키려는 더 넓은 의미의 정의 개념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순명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수도회 내부에서, 교회 내부에서 같은 선상에서 대화를 할 수 있기 바란다.
뿐만 아니라 수도자는 사회에 대해 예언자적 역할을 하여야 한다.
현대 세계에서는 수도회간의 협력뿐 아니라 타종교의 지도자들과 함께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식적, 외교적인 유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함께 협력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위기는 분명 도약을 위한 좋은 기회다.
수도 생활의 재창건이야말로 새로운 교회상을 만들어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시대의 징표를 읽어 현대 세계의 필요에 응답하고 세상을 변혁해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우리 안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참된 수도 생활을 가로막는 의식이나 관행을 타파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모색해 보고자 하는 나의 고찰은
수도자 전체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수도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녀들의 입장에서 말하게 된 것 같다.
우리의 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치유가 스스로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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