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묵상

2015년 7월 7일(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상지종신부님

별osb 2015. 7. 7. 16:38






마태오 9,32-38 (말 못하는 이를 고치시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라는 추수 밭에서 사랑, 희망, 기쁨, 생명, 정의, 평화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질 하느님의 결실을 수확하도록 부르심 받은 일꾼입니다.

주님의 일꾼으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기쁨과 보람이 가득할 때도 많이 있지만,

 때때로 무기력함과 허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가?’, ‘지금 나의 모습이나 삶의 방식은 옳은 것인가?’ 이런 저런 물음이 꼬리를 뭅니다.

주님의 일을 잘하고자 기도하고 노력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때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벗들이 주님 안에 하나 되도록 애썼지만, 서로가 갈라져 있음을 볼 때 이런 물음을 가지게 됩니다.

서로에게 맡겨진 주님의 사명에 충실하면서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주님의 일을 이유로 서로의 얼굴을 붉힐 때에,

일치와 화해의 도구로써 쓰여야 할 우리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곤 합니다.

의욕을 잃어버릴 때,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 곧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유혹입니다.

교회와 세상 안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소임은 다르다 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일꾼으로서 맞닥뜨리게 되는 가장 큰 유혹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유혹을 받습니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을 향한 호의가 오히려 나에 대한 무시와 경멸로 되갚아질 때에,

 나름 최선을 다했던 일에 대해서 싸늘한 냉대나 쓰라린 비난이 가득할 때에, 이러한 유혹을 더 강하게 느낍니다.

이럴 때면 마음에서는 한 판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만 두자, 포기하자’, ‘안 돼, 절대 그럴 수 없어’,

 ‘내 힘으로 안 돼,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져 버렸어’, ‘내 힘으로 하는 일인가?

주님께 왜 맡기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풀려고 그래. 주님께서 믿음의 벗들에게 주신 믿음과 가능성을 왜 내 마음대로 져버리고 포기할 수 있어?’

물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몸과 마음을 다시금 추슬러 한 걸음 힘차게 내딛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지만,

 이내 현실에 부딪히면 또다시 갈등하고 회의를 품게 됩니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더디더라도 쉼 없이 성장하고 주님의 쓸 만한 도구로 다듬어지겠지만 말이지요.

불같은 열정과 끝 모를 무기력감, 보람과 좌절, 신뢰와 불신 사이를 오가며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부족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신 후에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악의에 찬 모함을 들으셨지만, 오히려 더욱 굳건하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치유해주시는 당신의 일을 계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비난과 모함으로

상처 입은 당신의 아픔보다 쓰러지고 고통 받는 벗들이 아픔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셨기에,

 당신의 아픔에 머물기보다 벗들의 아픔을 씻어주시기 위해서 쉼 없이 나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의 길을 굳세게 걸어가신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추수할 것도 많고, 추수하기 위해 부르심 받은 일꾼도 많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추수를 끝마칠 일꾼은 부족하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위해 끝까지 함께 하는 참된 일꾼이 되도록 하여라.” 라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주님의 일꾼이 적음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주님의 참된 일꾼이 되기를 다짐하며, 오늘 하루도 기쁨과 열정으로 정성껏 보듬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의정부교구 송산본당 상지종 신부>


하느님 나라의 정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하여 분별하게 하고 사람을 소외시키는 마귀를 내쫓게 한다.

 소외는 현실을 바꾸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렇지만 해방을 가져다주는 정의는 구원을 독차지하고서

 특권자들의 작은 집단에 가두어두려드는 자들의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눈이 있으되 사물과 사건의 현상만 보고 본질은 보지 못하는 수가 많다.

 사물과 사건 속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려면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

그런 눈과 시력이 없어 못내 아쉬워하고 열망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예수께서 믿음의 시력을 되찾아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시력과 빛을 되찾아주고 싶으시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은 단순히 시신경을 되살려 주시는데 그친 기적이 아니었다.

 그 기적은 마음의 눈을 떠서 역사와 현실을 부유한 사람들과 권력자들의 시각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피지배자들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기적이었다.

 그래서 그 기적을 함부로 아무에게나 떠벌리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 기적은 가난한 사람들과 피지배자들이 알아들어야 할 기적,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할 기적이었다.

 완고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그런 기적을 가장 무서워 한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분명 마귀가 하는 짓이다.

 마귀에게 가위눌려서 바른 말을 못 하는 것이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정말 불쌍한 벙어리다.

이런 벙어리가 바른 말을 하고 나서는 것이 정말 큰 기적이 다. 예수님을 믿으면 바른 말을 맘껏 할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다.
위선을 일삼는 바리사이들은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오히려 마귀에게 사로잡혔다고 모함한다.

불의한 권력자들과 인정 없는 부자들은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불온한 사상을 지닌 불순분자로 몰아 고문하고 가두고 죽이기까지 한다.
예수님의 활동은 현실을 바로 보는 데서 생긴다. 예수께서는 현실을 바로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드신다. 즉 지치고 기가 죽은 백성과 한마음이 되신다.

 할 일은 엄청나다. 예수님의 사업을 이어받으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을 온 세상에 전하려는 집념을 가져야 한다.

 또한 그 신성한 사명에 앞장서기로 결심하는 일꾼들이 필요함을 깊이 의식해야 한다.
우리 사회와 세계는 불의가 제도와 체제로 굳어져 있다.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그 엄청난 불의 ,폭력, 인간차별, 인종차별을 없애는 데는

 개인 활동만으로는 부족하다. 연대하고 조직된 공동체들이라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려는 공동체 활동에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모두 추수하시는 하느님의 일꾼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일꾼이 되게 해 주시도록 기도드리자.

또 말과 표양으로 모든 신자를 하느님의 일꾼으로 만드는 일에 모든 시간과 일생을 바치고

 온 마음과 온 힘을 기울이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많이 보내 주시도록 기도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