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시절 오래된 일이다. 아녜 할머니는 하루 성체조배 두 시간과 묵주기도 세 꿰미는 기본이요, 매주 금요일이면 밤새워 예수님의 수난복음을 울며 묵상하셨다. 그분의 이 기도생활이 유별나게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분이 그렇게 기도하시던 밤이면 시끄러워서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 이게 더 중요한데 ― 바로 그 다음날 아침에도, 별것 아닌 일을 두고 차진 욕 섞어가며 어린 식간 자매를 참 한결같이 모질게 나무라셨기 때문이다. 얼른 밝히자면, 할머니는 나를 끔찍이 아껴주셨기에 개인적으로는 그분을 늘 애틋하게 기억한다. 기도와 조금도 관계가 없을 저 한결같은 냉정함과 잔인함은 젊은 신학생이던 나의 공부(옛말로 神功)를 심화시켜 준 또 다른 ‘스승’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 어떤 영성신학 수업시간보다 더 진지하고 절실하게, “기도란 과연 무엇인가?”하는 인생사 일대 의문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에 전해져오는 옛 격언에 “기도하는 대로 믿고 믿는 대로 기도한다.(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말이 있다. 좀 어렵게 들리지만, 전례기도는 신앙을 형성하는 원천이요 준거가 되고, 반대로 신앙 역시 기도의 젖줄과 틀이 되어준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한다.”라는 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정 면담 중에 더러 경험한 것이지만,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 알려면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보면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의 기도생활은 삶의 구체적인 면면을 살펴보면 말을 들어보지 않아도 그 질(質)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나름대로 오랜 피정안내 경험 끝에, 기도의 성숙도는 ‘기도체험’이 아니라 오직 '구체적인 삶' 혹은 '인간관계의 성숙도(사랑!)'에 달려있을 따름이라고 믿게 되었다.
긴 시간을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보내는 열심한 신앙인들이 왕왕 스캔들이 되는 것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어떤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사이와 세리의 모습은(루카 18,9-14) 바로 이 지점을 짚어준다. 바리사이는 자기 모상으로 지어낸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이 자기처럼 생각하실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그런 자기를 향해서 자족적이고 타인을 향해서 모욕적인 기도밖에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역설이지만 자기가 지은 죄 덕분에, 하느님이 자기와 얼마나 다른 분이신지 헤아리는 감각이 살아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 현존, 그 절대적 타자성 앞에 벌거벗은 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있다. 그는 하느님께 남이나 자기에 대해 말하기보다 하느님 자비에 온통 의탁하며 듣는 자세로 서있다. 예로부터 ‘듣기’야말로 기도의 으뜸이라 했다. 들을 때라야 기도는 ‘내 모상대로 만든 하느님’이 전복되고 살아계신 하느님이 들어서시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기도는 자기 뜻을 하느님께 관철시켜나가는 과정이 아니다.
옛 로마 철인 루크레티우스가 당대 다신교 신자들의 기도를 한 마디로 퉁쳐 이른 것처럼,
그것은 “신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faticare deos)”일 따름이다.
기도는 반대로 자기 뜻과 생각이 하느님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아듣는 과정,
‘원의가 정화되는 여정’(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십사 간절히 원하는 그런 여정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여정이 그러했지 않은가. 그러므로 십자가야말로 기도의 원형이요 고향이다. 바로 거기서 비로소 사람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거짓 신들이 파괴되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참 사람이 드러나는 까닭이다.
“수도원 나가라고 내가 기도한 사람치고 수도원 떠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며 자기 ‘기도빨’을 용감하게 자랑했다던 수도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교회의 ‘정치개입’에 분개하며 교회 안 수많은 ‘종북좌파’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시는 열심한 신앙인들도 계신다. 이분들의 모습에 옛 아녜 할머니의 얼굴이 얼핏 겹친다. 기도가 과연 무엇이냐던 오래된 질문이
요즘 다시금 속에서 고개를 쳐든다.
이연학 신부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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