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을 똑같이>
2014. 10. 31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평화방송 라디오 오늘의 강론)
루카 14,1-6 (수종을 앓는 이를 안식일에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나와 남을 똑같이>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왠지 마음 편안해지는 금요일 아침이 열렸습니다. 많은 직장이 주 5일 근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주말의 소중한 휴식과 가족들이나 벗들과의 오붓한 만남을 떠올리며 자연스레 웃음을 짓게 될 것입니다. 저는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기 때문에, 한 주간 만나지 못했던 우리 본당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렙니다.
꿀맛 같은 휴일을 앞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휴식의 날인 안식일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모든 노동에서 해방되어 휴식을 취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입니다. 안식일을 제대로 지내기 위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의 목록이 만들어졌습니다. 단 하루라도 제대로 쉬라는 배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이 목록이 족쇄가 되어, 사람에게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주는 대신 오히려 사람을 억압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라는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들과 꿈란 수도자들은 안식일에 사람이 우물이나 구덩이에 빠져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에 한해서 직접 끌어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동물이 빠진 경우에는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견해와 직접 끌어낼 수는 없지만 상자 같은 것을 내려 보내 스스로 기어 올라오도록 도와 줄 수 있다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이러한 의견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생명이 위독한 경우라는 전제 조건 하에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떠한 경우가 생명이 위독한 경우이겠습니까? 어디까지가 생명이 위독한 경우이고 어디까지가 그렇지 않은 경우이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그것을 판단합니까?
사실 생명이 위독하다는 기준 자체가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똑같은 경우라도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식이 아프면 열 일 다 제쳐놓고 달려가지만, 남의 자식이 그보다 더 심하게 아프더라도 자신의 일을 핑계 삼아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이 위독한 경우라는 애매한 기준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고쳐 줄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 라는 기준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안식일 규정에 타당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애매한 전제 조건 자체를 없애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나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남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달리하는 이중적인 모습에 대한 질책이며, 동시에 이 이중적인 기준을 하나로 모아 안식일 법을 사람을 살리는 법으로 다시 세우시는 선언입니다. 또한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가 소중한 하느님의 사람임을 깨닫고 다른 이를 보듬어 안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사람 사는 세상의 가장 큰 위기는 ‘사람들의 공감 능력의 상실’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피눈물 흘리며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예전에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가 무너져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유가족들이 쓰려졌을 때에,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때 내 일처럼 받아들이고 함께 했다면, 내 아이가 이렇게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어머니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의 잃어버린 공감의 능력은 회복되지 않는 듯싶습니다.
이러한 세상 한 가운데서 믿음의 벗님들이 먼저 나서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어주시는 공감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여, 주위의 슬픈 이들, 아픈 이들의 참 이웃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